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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4 02:34
6.25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하는 일들|
 글쓴이 : 9전10승
조회 : 26,128  

           

1. 스탈린의 음모


1949년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 했다. 그 이전 모택동 군대가 장개석의 국부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양자강을 경계로 모택동과 장개석 간의 휴전과 동시 두 개의 중국이 존재하도록 모택동에게 제의를 했었다.

 

그것은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으로써 만약 장개석의 국부군을 더 이상 몰아치면 미국의 군사개입이 염려 되었고 또 국경을 마주하는 모택동이 거대 중국으로 통일했을 경우 부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통일에 성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택동 측에서는 국경 문제로 소련에 대해 매우 불만에 차 있었다.  비근한 얘로 한창 모택동이 장개석 군대와 싸우고 있을 무렵 소련군들이 국경을 표시하는 경계석을 밤만 되면 수 백리씩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2. 1949년의 에치슨 라인


간단히 얘기하자면 당시는 미국이 극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이나 정치적 식견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반도를 빼 먹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해 미스터리가 생긴 것은 오히려 당시 우리 국회의 속기록 행방이다.  

즉 그렇게도 중요한 당시 국회의 에치슨 라인에 대한 속기록이 없어진 것이다.

당시 속기록에는 우리 국회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소상히 기록 되어 있을 것은 물론 혹시라도 징비록 같은 내용이 담겨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역으로는 어떤 의원들이 의도적으로 정부로 하여금 무시하도록 유도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두 번이나 이와 유관한 학계의 학자들이 샅샅이 찾아본 바 있으나 결국은 끝내 찾아 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3. 소련의 무기지원과 미국의 무기철수


소련은 2차 대전 때 쓰던 탱크 등 많은 무기들을 6.25 직전 북한으로 이동을 했다.

반면 미국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3년간의 군정을 마친 후 탱크도 우리 지형에 맞자 않다는 구실로 모두 철수를 시켰고 바주카포도 실탄은 탱크 파괴용이 아닌 인마 살상용만 두고 철수를 했다.


4. 개성에서의 빈번했던 전투


육탄 10용사는 6.25 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그 이전 국군이 새 진지를 개성 북방 산악 지역에다 구축하던 중 일어났던 피아간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개성에서의 상호 충돌은 6.25 전 이미 자주 일어났던 일이었다. 나는 당시 개성 경찰서장을 하셨던 분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얘기다. 

 

5. 남로당의 마수 그리고 성시백의 평화회담 제의


토지 개혁은 1949년 국회를 통과했고 지주들에게는 유상몰수 소작인들에게는 유상분배를 했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지급 된 지가증권은 5년 분할 상환으로 1950년부터 5년간 균등하게 지급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상환 1차 연도인 1950년에 6.25 사변이 나 심할 때는 400%에 육박하는 인프레로 지주들의 지가증권은 그 가치가 땅에 떨어져 항간에는 “부자를 거지로 만들었고 농민은 농민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팽배했다.


남로당은 처음에는 미 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회적으로 테러와 큰 혼란을 일으켜 곧 미 군정으로 부터 불법 단체로 낙인찍히는 통에 해산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당시 지식이 열악했던 농민과 노동자들을 파고들어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농토를 무상몰수 무상 분배를 한 북한의 예를 들어가며 특히 농민들을 많이 노동당에 가입을 시키고 있었다.


후일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무상 몰수만이 있었고 무상분배는 집단 농장화 했으며 공산혁명이 일어나면 농민 모두가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다고 선전했던 남한의 남노당도 점차 농민과 노동자들이 깨닫기 시작하자 그 세력이 많이 약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968년 1월말 월남전에서의 구정휴전기간 동안 총공세를 받았던 우리의 경험처럼 공산주의자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기만전술을 쓰는 데는 이력이 난 존재들이다.

 

북한의 민족영웅 제1호는 성시백이다. 1949년 김일성은 성시백으로 하여금 우리 정부에 평화회담을 제의했다. 정부에서는 그 이전 성시백의 전력을 미리 알아 형장의 이슬이 되게 하였지마는 그들이 유연한 제스처를 쓸 때는 항상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6. 남노당의 자금 조달과 국회 프락치사건 그리고 보도연맹


지하로 숨은 남로당은 자금이 필요했다. 급기야는 조선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기 시작했고 당시 사장은 현직의 국회의원인 모 야당 의원의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국회 내의 의원들 약 20여명은 바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암약하던 프릭치들로 결국은 탄로가 나 이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처형 되었다.


한편 남로당의 허언에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씻고 정부에서 만든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하도록 했고 이들은 공산주의가 허울뿐인 거짓이라는 것을 여러 국민들에게 알리는 하나의 선전 단체로 존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을 하자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한 많은 보도 연맹원들이 앞잡이 노릇을 해 정부에서는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인민군의 미 점령지 보도 연맹원들을 모두 재판도 없이 학살을 했다. 한때 정부에서도 그 당시 학살 된 사람들의 수가 거의 15만명은 되는 것으로 비공식 판단을 했던 바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주로 초등학교 정도의 자식들을 두고 있던 피 학살자들이 많아 졸지에 가장이 없어진 아녀자들의 생계 책임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제사를 4대나 지내는 우리 풍습과 더불어 그들의 후손들은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숨겨진 하나의 사회병리 현상이 아닐 수 없다. 

  

7. UN의 결의와 소련의 불참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UN군이 한국전에 참여를 한다는 것은 하늘이 도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결의 당일 공교롭게도 소련 대표는 결석을 해 한국전에 UN이 참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며 대표적으로는 투표 전일 자유진영에서 소련대표로 하여금 술에 잔뜩 취하게 함으로써 불참을 유도했다는 설과 스탈린이 모택동을 견제하기 위해 은밀히 지령을 내렸다는 설도 있다.

 

8. 경계령 해제와 6월 24일 밤의 국방부 땐스 파티


6.25일이 가까워지자 경계령도 해제 되고 농사철을 빙자로 휴가도 많아졌다. 또 6월24일 밤에는 장교들의 땐스 파티가 있었다. 이것은 이형근 장군의 6.25의 10가지 미스터리 중에 있는 얘기다.


9. 이승만에게 보낸 맥아더 장군의 편지


대구가 위태롭게 되자 맥아더는 대구 지역으로부터의 아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당시 결찰 총수인 조병옥 박사는 만약 군대가 철수하면 우리는 경찰력으로라도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해 UN군을 붙들어 놓았다.


전세가 낙동강 최후 전선에 걸쳐있고 전세가 매우 어려웠던 때 어느 날 이승만은 맥아더의 친서를 받는다. 내용은 한국의 요인들과 그 가족 5만 명을 오끼나와에 피난시켜 줄테니 남한을 포기하자는 제의였다.


이승만은 마지막 나 혼자서라도 싸울 테니 가려면 모두 다 가라고 고함을 쳐 전령으로 온 미 육군의 한 장군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돌아가게 만들었다. 

 

10. 만주에 떨어뜨린 세균탄과 전술 핵 무기 실험


시기는 불확실하나 미국이 만주에 세균탄 실험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급기야 주은래가 그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미국을 직접 비난하고 국제 사회에 나팔을 불기 시작했던 일이있었다. 물론 미국은 그 실험에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라 실패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몇 년 전 공개가 된 사실이지만 6.25 당시 전술 핵무기 시험을 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휴전 직후 그 현장들을 우연히 보았다는 나무꾼들의 증언이 나돌아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도 나무하러 깊고 높은 산으로 다니던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적이 있다. 즉 인민군과 아군의 형체는 그대로였으나 만지니 재가 되더라는 소문이었다. 


************************************************** 끝.

 


관리자 16-07-21 17:55
 
세계 3대전쟁사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감명깊은  秘話를 잘 읽었습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 이군요...재운
9전10승 17-01-06 01:10
 
저가 쓴 것은 Fact에 기초한 것이며 시쳇말로 요즘은 좌빨들이 하도 기승이라 우리가 뻔히 경험을 했던 것도 왜곡을 시키고있어 아예 잣대를 하나 만들어 버렸습니다.  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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